티스토리 뷰




알고보면 재밌는 불교철학 1 "나는 누구인가" 
https://araboza.me/29


1편에서는 브라만 교의 아트만 사상에 대해서 다루어보았다. 
브라만 교에서는 절대불멸하는 나의 순수한 영혼을 아트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의 아트만은 세상의 모든 질서를 아우르는 브라만이라는 개념과 합치시키려 했다 (아트만 = 브라만, 범아일여). 

브라만 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완전한 육체를 가진 개개인은 명상과 수행을 통해 아트만을 직시하고,
또 아트만이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브라만과 동일하다는 깨달음에 이르러서 행복해질 수 있다고 했다. 

즉, 삶을 고단하게 만드는 원인인 집착과 욕망은 불완전한 육체에서 비롯된 것이니, 
명상을 통해 순수하고 맑은 영혼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명상의 이로움은 현대 과학에서도 깊이 연구하는 분야이다. 
명상을 수행하는 도중에 우리는 편안함과 스트레스의 해소를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뿐이다. 
명상을 그만두는 즉시 우리는 삶의 고됨과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는 평안했던 정신세계가,
눈을 뜨고 흘러내리는 코인 가치를 마주하거나 갚아야 할 대출 이자를 바라보면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따라서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탈이나 번뇌로부터의 자유라고 말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불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싯다르타는 브라만 교에 대한 반박과 자신의 철학을 전파했다. 



2. 초기 불교의 무아론

1편에서 "자아"의 개념과 현대 생물학의 발견을 관련지어 논하는 댓글을 찾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평소엔 아무리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도, 호르몬을 비롯한 내분비계의 이상을 겪고 있거나
혹은 알코올이나 마약 등 화학 물질의 중독 상태라면 멀쩡한 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현대 과학의 가르침에 친숙한 우리는 브라만 교의 아트만 개념이 얼마나 비과학적인지 알고 있다. 
자아와 정신과 육체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육체와 분리된 "순수한 영혼"이 존재할 수 있는가? 

만일 "순수한 영혼"이 존재한다면, 뇌를 다쳐도 인지능력과 감정을 비롯한 정신적인 작용이 손상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브라만 교에 따르면 뇌는 한낱 미개하고 불완전한 육신의 일부일 뿐이고, 정신적인 작용은 영원불멸한 순수 자아인 아트만에 속하는 영역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주장인지 잘 알고 있다.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의 "무아론"의 핵심이다. 

실제로 브라만 교를 수행했던 싯다르타는 아무리 수행해도 만족스러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 했다. 
싯다르타는 그 이유를 "아트만의 존재에 대한 집착"으로 보았다. 

즉, 싯다르타의 이론에 따르면 애초에 아트만이란 없다는 것이다.
불완전한 육체에 대비되는 순수하고 완전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 한자로 무아론이라 지칭). 

그렇다면 지금 당장 키보드를 두드리는 나는 무엇이고, 또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아트만이 없다면 너는 도대체 누구냐? 

싯다르타는 이에 대답하기 위해 오온(5온) 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바로 우리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실제로 다섯 가지 개념 (다섯 온 = 오온)으로 이루어진 그 무언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다섯가지란, 색, 수, 상, 행, 식으로, 이는 각각 다음을 의미한다. 
색: 물질적인 신체
수: 내가 물질 세계를 인지하며 느끼는 감각
상: 물질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
행: 행동과 그 행동의 결과
식: 의식

이를 좀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기원전 2세기 초기 불교의 철학자 나가세나의 기록을 참고해 보자 (나선비구경 참조). 
나가세나는 오온과 "자아"의 관계에 대해 수레의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수레라는 것은 없다. 수레라고 하는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손잡이, 의자, 바퀴, 바큇살 등등으로 이루어진 "무언가" 일 뿐이다. 
하지만 손잡이를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의자를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바퀴를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바큇살을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손잡이와 의자와 바퀴와 바큇살을 모두 합한 것을 수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수레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이런 부품들을 합한 것이 아니다. 
각자의 부품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야만 수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수레라고 부르는 무엇인가는 실제로 수레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수레가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수레는 실제로 내 눈앞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수레가 "영원불멸한" 수레의 모습이 아닐 뿐이다. 
언젠가 낡아서 부서지고 깨지면 손잡이, 의자, 바퀴, 바큇살과 같은 부품으로 갈라질 찰나의 존재에 불과하다. 
물론 손잡이, 의자, 바퀴, 바큇살 또한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수레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불멸한 수레의 이미지는 타당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수레가 "비어있다 (공하다)"고 표현한다. 



자아와 오온의 관계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애초에 인간에게 (브라만 교에서 주장하는) 영원불멸한 자아 (아트만)와 같은 것은 없다. 
다만 그 자아를 구성하는 색, 수, 상, 행, 식 (5온)의 개념이 존재할 뿐이다. 

이렇듯 고타마 싯다르타는 아트만으로 비롯된 브라만 교의 모순을, 아트만 그 자체를 해체하면서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싯다르타에 따르면, 고통스러운 나 자신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가 자아라고 인식하는 그 무엇인가는 그저 우주의 법칙에 의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일 (공한 존재일) 뿐,
그 어디에도 "영원불멸한 자아"와 같은 것은 없다. 

싯다르타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통을 느끼는 주체인 "나"가 실존하지 않는다 (공하다)는 개념을 이해할 때, 
우리의 고통은 사라지게 된다. 
한낱 우주의 먼지에 불과하고, 살아왔던 기간보다 죽어있던 기간이 훨씬 더 긴 인간의 삶이 어떻게 고통스러울 수가 있겠나. 

하지만 싯다르타의 사후, 초기 불교는 여러가지 파벌로 갈라지게 된다. 
다음 편에서는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두 파벌을 소개하려 한다. 

한 파벌은 싯다르타가 설한 무아론은 인정하되, 각자의 오온 (색수상행식)은 공하지 않으며 실재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파벌은 자아가 공한 만큼 자아를 이루는 오온이라는 요소 또한 공하다는 입장이다.